1997년, 경제 위기 속 서울 한복판. 쇠락한 밤거리에 불타는 빌딩과 붕괴된 기업들의
유령들이 어둠 속에서 움직인다. 남성 주인공 김준혁은 자신을 낳아준 시어머니 정숙자와
의 결혼을 강요받는다. 그녀는 과거 회사의 실세였고, 지금은 무너진 재벌 가문의 유령으
로 살아남은 자들 중 하나다.
지하철 4호선 지하 터널 안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다.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시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법칙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꾀한다. 김준혁은 시어
머니가 제공하는 ‘생존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시스템은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먹여주는 ‘빙의’ 조건을 내걸고 있다.
시어머니는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기억해야만, 내가 당신을 살릴 수 있어.” 그
녀의 눈동자는 빛나지만, 그것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처럼, 그녀는
김준혁의 과거를 알고 있고, 그의 선택을 앞서 알고 있다.
그는 결국 시스템에 동의한다. 자신의 기억 일부를 시어머니에게 넘긴다. 동시에 그녀의
기억도 함께 받는다. 그 순간, 김준혁은 자신이 20년 전에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된다.
시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다시 살아나는 대가로 그녀의 결혼 상대가 되어야 했다
.
그날 밤, 두 사람은 폐허 속에서 혼인식을 연다. 신부는 시어머니, 신랑은 그 자신.
관객은 죽은 자들의 유령들.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생존의
도구다. 김준혁은 설렘을 느끼며, 시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그 손에는 과거의 피가 아직
남아 있고, 미래의 약속이 새겨져 있다.
시간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새로운 시작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