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서울 강남, 한강변에 자리 잡은 대형 제조업체 '진양그룹'
의 본사 건물 30
층. 회장의 아들 이준호는 그곳에서 출근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눈앞에 펼쳐
진 건 평소와 다른 건물 내부였다. 벽면에는 붉은 빛이 스며들고, 계단마다 보스 몬스터
가 웅크리고 있었다.
이준호는 지난해 사고로 죽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받은 후유증이 지금도 몸속에 남아
있었지만, 어쩐지 이번엔 다르게 느껴졌다. 손바닥 위로 새겨진 '시스템 초기화
완료'
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재벌 기업이라는 명목 아래, 진양그룹은 실제로는 세계적인 전투 시뮬레이션 시설이었다.
모든 직원은 일정 주기로 던전 출입을 강제받았으며, 실패하면 지위와 생명을 잃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 시스템은 정권의 압박과 경제 위기 속에서 탄생했으며, 현실을 모방하는
‘현실 시뮬레이션’ 기술로 구동되었다.
이준호는 과거의 상처—친구의 죽음, 가족의 배신, 자신의 무능함—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
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던전'이라는 단어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결심을 했다.
첫 번째 미션은 '주식 거래실'이었다. 거기서 등장하는 보스는 바로
이준호의 아버지였다
.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눈빛은 차갑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너는 나의 자식
이 아니야"였다. 이준호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멈춘 듯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반
응했다.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면, 당신은 누군가의 부모가 될 수 없다."
그 말과 함께, 이준호는 아버지의 허벅지를 꿰뚫고 날아든 칼을 막았다. 그의 손에는 마
치 실존했던 것처럼 검이 드러났다.
시작된 던전 클리어링. 이준호는 하나씩 그들의 과거를 되돌리며,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친구, 어머니, 그리고 스스로. 그의 목표는 단 하나—진양그룹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그 안에 갇힌 수많은 직원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준호는 최종 보스인 '진양그룹 시스템 코어'를 찾아갔다. 그
안에 숨겨진 것은
정권의 압박, 경제 위기, 그리고 수많은 인간들의 고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통합해
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제부터 이 곳은 진양그룹이 아닌, '희망 그룹'이다."
이준호는 그 말을 남기며, 시스템을 종료했다. 그날 이후, 강남의 건물들은 변했다. 사
람들은 더 이상 던전 속에 갇힐 필요가 없었고, 그곳에서 생존하려는 압박은 사라졌다.
그의 행동은 곧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회사 구조, 경제 체계,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그의 선택은 단순한 회귀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짜로 변화를 원하는 한 남자의
결심이었다.


